저의 꿈이 제대로 정의된 건 2022년 말이었고, 그전까지는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유치원생 때부터 확실하게 좋아했던 건 있었습니다.
바로 리더였습니다.
유치원생 때 ‘이끔이’라는 역할을 시작으로,
초등학교, 중학교 반장 부반장은 빠지지 않았고,
고등학교에서는
1학년 부대표, 2학년 전교 부회장, 3학년 대표까지.
사람들의 선두에 서서 이끄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나름 장점으로 생각하는 기질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외향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 건,
기질적인 측면도 있지만 아버지 직업 특성상 이사가 잦았고, 그렇게 초등학교 두곳 중학교 두곳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면서였던 것 같습니다.
기질과 환경의 융합으로 성향이 강화된 사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초등학생 때 위클래스에서 또래 상담사로 활동하기도 하고, 이후로도 친구들이 고민이 있으면 저부터 찾아올 정도로 고민을 진지하게 듣고, 공감해주고, 해결 방안을 제시해주는 것이 제 성향에 맞았습니다.
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전 0번째 꿈: CEO,
인생의 큰 전환점이 있기 전, 고등학교 1학년 1학기까지 저의 꿈은 CEO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엔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기업의 리더가 되어 사람과 기업을 이끌어나가는 직업적 성격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수학, 과학을 좋아하지만 CEO는 경영이니까 문과에서 공부해야지” 라는 생각만 할 정도로 진로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외향적인 성격이 강한만큼 노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 당시 상위 4% 학생으로 입학할 정도로, 중학생 때 높은 성적을 유지했고,
이것만을 믿은 상태로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부터 2학기 중간고사까지 벼락치기만 반복했고,
성적도 벼락을 쳤습니다.
하지만, 1학년 2학기 기말고사 기간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고,
그 사건을 계기로 저는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던 사건: 1학년 2학기
2017년 11월, 1학년 2학기 기말고사 기간이었습니다.
자원봉사 동아리 RCY의 부원이었던 저는
동아리원들과 RCY 대회를 위해 동아리방에서 연습을 마치고 종례시간에 맞춰 교실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학교 구조상 동아리방과 교실 사이에는 기숙사로 향하는 인도 겸 차도가 있었고,
저는 그곳에서 기숙사를 향하던 차량과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습니다.
차, 교실로 같이 돌아가던 동아리원들 그리고 저도 다 같이 놀라서 멈췄습니다.
순간 멍해지기도 했고 아프지도 않았어서 저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교실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석식을 먹을 때 부딪힌 부위가 갑자기 아파오더라고요.
다시 사고지점으로 갔지만, 차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아무래도 제가 티를 안 내고 가서, 차주분도 그냥 기분탓이겠거니 하고 갔었지 싶습니다.) 주변에 CCTV가 있어서, 행정실에 CCTV 자료를 요청했지만 열람이 불가하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하필 금요일 저녁이라 퇴근시간이기도 했고, 병원에 가서 상태를 체크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해 엄마와 함께 병원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신체에 직접적인 문제가 발생하진 않았더라고요.
그렇게 안도감을 느끼며, 교무실로 돌아와 선생님들께 상황을 말씀드리고, 안정을 취하며 주말을 보냈습니다.
모든 게 별 탈 없이 흘러갈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주말에 큰 문제의 신호탄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교내에서 학생과 학부모 차량의 접촉사고가 발생해, 교내 차량 통행을 전면 금지합니다.”
전교생의 반 이상이 기숙사를 활용하는 기숙사 중심 학교.
기숙사까지 가는 길이 오르막길이라, 차량 통행이 거의 필수였는데,
주말, 기숙사에서 학생들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기숙사생인 친구에게 전해듣길, 기숙사가 난리가 났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러니하게도, 일부 기숙사생들의 분노의 화살이 저를 향하기도 했습니다.
월요일 아침, 기숙사를 이용하지 않는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교실에 도착했는데, 학생들이 저에게 우루루 몰렸습니다. 괜찮냐고 묻는 친구, “얘가 어제 너 욕하던데 오늘 너한테 괜찮냐고 묻더라”라고 얘기하는 친구, “기숙사생들이 다 너 욕하더라, 뭔 일 있었냐”라고 하는 친구 등등.
갑자기 학생들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고, 접촉사고의 피해자가 누군지 공개하진 않았지만, 소문이 퍼지는건 시간문제였죠.
그때부터, 전교생의 시선에 크게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교무실에서도 저를 자꾸 부르더군요.
(여기서 깊은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당시 느낀 생각은 이랬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 있구나”
“학교는 나를 지켜주지 않는구나”
“사람들은 표면적인 것을 보고 쉽게 해석하는구나”
지금 돌아보면, 저를 욕한 사람은 극히 일부였을 테고,
그마저도 저 자체를 욕하는 게 아니라 차량 통행이 금지된 원인에 화가 난 것이었을텐데,
당시의 어린 저는 모두가 저를 욕하고 있다고 생각해 사람들을 의식하게 되고,
제가 직접 사람들에게 오해를 풀고 도움을 요청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고,
행정과 어른의 민낯을 보게 되고,
시험기간까지 겹치다 보니, 극한의 스트레스를 겪게 됩니다.
그렇게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중, 터질 게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잠을 자다 눈을 떠보니 제가 구급차에 실려가고 있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피로까지 누적되다 보니, 결국 몸에 적신호가 켜지게 된 것입니다.
아픔과 함께 저는 사람과 학교에 대해 큰 혐오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담임선생님 덕분에 이 순간을 빠르게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가족은 물론이고요)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은 내가 사람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던 기점
담임선생님은 문제가 발생한 순간부터 쭉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무뚝뚝하시고, 학생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클 정도로 차가웠던 선생님께서,
제가 무너지지 않게 계속해서 지지해주셨습니다.
이 사진은 기말고사 첫날 선생님께서 편지와 함께 주신 박카스입니다.
선생님도 계속 저를 신경써주시느라 정신이 없으셨는지, ‘중간고사’라고 쓰셨더라고요. 
저는 그날 처음 무뚝뚝한 선생님의 감정적인 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겨울 방학동안 사색의 시간을 길게 가져봤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의 시간 동안 되게 많이 놀았더군요.
그런데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담임선생님은 계속해서 저를 혼내시고, 꿀밤을 때리기도 하시면서 끝까지 저를 바른 길로 인도해주고 계셨더라고요.
이번 사건으로 힘든 시기 동안에도, 손을 놓은 일부의 어른들과 달리 유일하게 끝까지 제 손을 잡아주시기도 했고요.
이때 저는 멘토의 힘, 멘토의 존재 이유를 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도 담임선생님처럼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크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인생 첫 죽을고비(?)를 겪고 나서,
”인생 한 번인데 맞서고 싶을 때 맞서고, 하고 싶은 거 도전하는 사람이 되자”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게, 지금의 저를 만든 첫 번째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습니다.




